대한민국 산업화의 기록은 언제나 박수와 환호로 채워졌다. 굴뚝이 솟고 골리앗 크레인이 하늘을 가를 때면 그 장면은 국가 경제의 성장과 자존심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산업 역사의 바깥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고통, 기록되지 않은 시간, 그리고 이름 없는 희생이 존재했다. 거제 장평동의 지난 세월이 바로 그 이야기다.
잊혀진 마을공동체 기억 — 연곡·장평·와치가 품었던 평온함
장평동은 본래 연곡·장평·와치 세 마을로 이루어진 고요하고 정겨운 농·어촌이었다. 연곡과 장평은 계룡산 자락 아래 넓은 논과 밭이 펼쳐진 순수한 농업지대였다.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로지 마을은 바다 기암과 수심 깊은 해변과 갯벌이 있었고 귤도(유자섬)와 죽섬(동백·대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놓인 아름다운 촌락이었다. 훗날 이곳은 깊은 수심으로 포로수송선 미군 함정 부두가 되기도 하였다.
와치 마을은 대구어장과 자갈해변을 품고 있던 피솔동네와 유자섬을 마주 보던 나안방은 반농반어촌 정취가 살아 있던 전형적인 농어촌 공동체였다.
장평동 배후 젖줄인 계룡산 중턱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산림녹화 정책으로 주민이 합심하여 조성한 국유지 편백림 17만 평이 마을을 감싸며 거대한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고, 그 초입의 ‘물 맞는 골’ 바위 약수터는 칠월칠석날이 다가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약수에 몸을 씻고 정을 나누던 특별한 공동체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풍경과 문화들은 조용히, 그리고 너무 빠르게 대부분 잊혀져 갔다. 1980년대 조선산업 확장의 거센 흐름 속에서 땅은 헐값의 강제수용 방식으로 기업에 넘어갔고, 연곡·장평의 비옥한 들판은 조선소 공장지대와 주거지로 모습을 바꿨다.
이 시절 존재했던 비행장 활주로, 가로지 해변의 절벽기암, 포로수송선 부두, 귤도(유자섬)와 거제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죽도(대섬)의 동백숲 모두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상실을 호소하던 토착민들의 목소리는 허공 속의 메아리로 흩어졌고, 산업화의 찬란한 부흥 뒤편에서 이 마을들의 흔적과 이름은 단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였다.
지역사회 공헌의 격차 — 이 지역이 가장 큰 피해지역이 된 이유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은 장승포를 중심으로 병원·교육시설·문화재단 등 눈에 보이는 사회공헌을 꾸준히 실현해 왔다. 반면 거제시 인구 절반이 밀집된 장평·고현·상문·수양 일대는 상황이 달랐다.
삼성중공업이 이 지역을 기반으로 조선소를 운영해 왔음에도 지역 주민들이 체감한 공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약속했다가 무산된 거제시 실내체육관, 경영진 반대로 좌초된 고현만 아일랜드 프로젝트는 지역민의 기대를 연이어 무너뜨렸다.
반세기 동안 조선산업의 심장을 떠받쳐 온 (구)신현읍 일대는 기업의 성장 이익을 나누지 못한 채 환경·교통·소음·분진 같은 건강·생존의 부담만 떠안고 살아왔다.
매일 출퇴근 시간마다 3,000대에 달하는 오토바이·통근버스·자전거가 뒤엉켜서 자욱한 연기와 일산화탄소를 내뿜으며 도심의 환경과 주민의 호흡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삼성 사원아파트가 1천억 원에 매각되면서 벚나무 숲이 사라지고 차폐 역할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로 인한 2차 환경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이 또다시 떠안고 있다. 하지만 기업과 행정은 묵묵부답으로 수수방관하고 있다.
여기에 외국인 근로자 5,000명 상주에 따른 문화 혼란과 치안 공백이 겹치며 젊은 인구는 빠져나갔고 상권은 붕괴되었으며, 이 일대는 국가가 지정해야 하는 ‘위기도시 1번지’로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
국내외 기업의 공진화 경험이 주는 메시지
독일 루르는 폐광과 제철소를 문화·생태도시로 재생시켰다. 스웨덴 말뫼는 조선소 부지를 연구·주거·문화가 공존하는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일본 요코하마의 ‘미나토미라이21’은 항만·공장지대를 도시 미래 플랫폼으로 재구성했다.
포스코와 포항의 관계는 기업시민 모델을 도시 전체로 확대해 교육·환경·문화를 기업 책임으로 끌어올린 대표 사례가 되었다. 이 도시들이 말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산업도시는 공진화로 바꿀 수 있으며, 그 변화는 기업·지자체·주민의 공동 로드맵에서 시작된다.
장평동도 이제 이 길로 나아가야 한다. 삼성과 거제시, 장평 주민이 함께 ‘공진화’라는 새로운 시대적 선택을 해야 한다.
장평 공진화 8대 프로젝트 전략 — 중매산을 삼성웰니스공원으로
장평의 미래는 중매산과 도심, 산업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도시로의 재탄생에 달려 있다. 거제시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삼성에서 콘텐츠를 실행하는 공동 프로젝트이다.
중매산에는 근로자와 주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웰니스 치유센터, 청소년수련관, 숲속도서관, 실버 무료급식소, 맨발길·햇빛존·명상존 같은 복합공공시설을 조성해 오염을 완충하고, 공동체를 치유하며, 도시의 숨 쉴 틈을 만들어야 한다.
삼성–거제시 공진화 역사관은 이 지역의 변천과 주민의 희생을 기록하는 상징적 공간이 될 것이다. 현재의 도심공원에서는 포로수용소 유적과 사라진 비행장·헌병대·수송선 부두를 AR·VR 기술로 복원해 장평을 “평화·인권 교육도시”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포로수용소 보급창고 공원을 리모델링하면 역사와 교육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나아가서 도요지 발굴·전시, 대나무 공예거리 조성, 농악대 전승센터 설립을 통해 전통 문화자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첨단산업과 공존하는 도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또한 직업병·호흡기·근골격·정신건강·재활을 아우르는 주민·근로자 건강증진센터를 우체국 인접 거제시 부지에 구축해 지역의 건강취약성을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외국인 근로자 5,000명의 건강·교육·치안·법률·한국문화 적응을 통합 지원하는 다문화교류센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전국 최초의 공진화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예산 지원을 확보할 수 있다.
지금 가장 심각해진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월급이 다시 장평으로 순환되도록 지역 포인트제, 야시장·청년창업거리 조성, 관광형 골목상권 활성화, 무엇보다도 청년 일자리를 구축해야 한다.
그 대안으로 마이스터고를 정원 500명으로 확대시켜 전원 삼성·대우에 취업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10년 지나면 5,000명이 양대 조선에서 일하게 되고 3인 가족이 형성되면 1만 5천 명의 인구가 늘어나며 도시 활력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이번에 25명 직영사원 채용에 1,100여 명 응시했다는 후문을 짐작하면 충분한 지원 가용 학생이 가능하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환경 문제. 소음·분진·수질·대기 데이터를 실시간 공개하고 기준 초과 시 자동으로 조치되는 시스템을 도입해 “환경 비용은 기업 책임”이라는 원칙을 확립하고 환경저감 감시위원회를 기업·주민·행정이 합동하여 구성해야 한다.
이 모든 변화는 삼성·거제시·노조·주민이 함께하는 공진화 준비위원회가 10년 로드맵을 수립하고, 국·도·시비와 삼성 ESG, 국제기금을 결합해 매년 성과를 공개하는 방식으로 추진해야 한다.
장평은 더 이상 침묵의 변두리가 아니다
장평동은 대한민국 조선산업의 심장을 떠받친 보이지 않는 희생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과제는 분명하다. 기업의 성장과 지역의 쇠퇴가 반복되는 시대를 과연 언제 끝낼 것인가?
루르도, 말뫼도, 요코하마도 기업과 도시가 손을 잡고 변화를 이끌었다. 이제 거제 장평동이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장평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미래를 함께 설계하자고 제안하며 선언하고 있다.
대한민국 산업도시가 가야 할 길, 그 새로운 모델을 이 작은 도시에서 먼저 실행하고 증명하려 한다. 그 이름이 바로 장평동–삼성조선 공진화 상생 프로젝트다.
주(註)
이 글은 장평동과 삼성중공업의 공진화를 통하여 나아갈 방향을 제안한 것이다. 다소 주관적 견해와 내용이 담겨 있음을 밝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