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며, 전쟁과 고난을 이겨낸 기록이고, 공동체가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온 기억의 서사이다.
하나의 공간에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이 겹겹이 축적되는 것을 ‘역사의 층위(Palimpsest)’라고 한다. 새로운 시대가 이전 시대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또 다른 시간이 쌓이면서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오늘 거제시 고현동 옛 거제군청 부지에서 주민센터 건립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고현동 주민센터를 어디에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고현성 500년의 역사 현장을 어떻게 지키고 미래 세대에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 거제가 어떤 역사문화도시로 나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유적은 고현동만의 것이 아니다. 거제시민 전체와 다음 세대가 함께 물려받아야 할 역사적 공공자산이다.
고현동 옛 거제군청 부지는 매우 희귀한 복합 역사공간이다.
그 첫 번째 역사층은 조선시대 고현성(古縣城)이다. 1453년 단종 원년에 축조된 고현성은 조선 전기 거제현(巨濟縣)의 행정과 군사의 중심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첫 승전을 거두었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이후 왜군은 당시 거제현 읍성이던 고현성을 5월 9일 공격하였고, 5월 13일 성주와 의병들은 끝까지 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으며 고현성은 함락되었다.
고현성은 단순한 읍성이 아니다. 거제인의 호국정신이 살아 있는 상징이며, 임진왜란 당시 거제인의 항전과 전국최초 의병의 역사가 함께 살아 숨 쉬는 현장이다.
이번 발굴에서 확인된 성벽 기단과 성내 도로는 문헌으로 전해지던 고현성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그리고 근현대사가 한 땅에서 만나다
이곳의 역사는 조선시대에서 멈추지 않는다.
6·25전쟁 당시 거제에는 최대 17만여 명의 포로를 수용한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당시 UN군은 고현성 성벽 일부를 헐어 헌병대 막사와 배수시설을 설치하는 데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외적을 막았던 완벽한 성벽이 350여 년 뒤 또 다른 전쟁의 한복판에서 다시 사용되며 크게 훼손된 것이다.
이번에 확인된 막사 터와 배수시설은 단순한 전쟁 유구가 아니다. 조선의 임진왜란과 6·25전쟁이라는 두 거대한 전쟁사가 하나의 공간에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대의 역사가 한 장소에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고현성 유적의 핵심적 가치다.
그리고 그 위에 또 하나의 역사층이 쌓였다. 옛 거제군청이다.
1953년 거제군이 다시 설치된 이후 이곳은 전쟁의 폐허에서 지역공동체를 재건하는 행정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군민의 행정과 복지가 다시 시작되고, 교육과 산업, 지역사회의 삶을 지탱해 온 거제 행정사의 산실이 된 것이다.
결국 이 한 공간에는 고현성 전투와 임진왜란, 6·25전쟁과 포로수용소, 전후 거제 행정사에 이르는 500년의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개별 유구만이 아니다. 성벽과 성내 도로, 포로수용소의 경비막사 흔적, 옛 군청의 기억이 바로 이 자리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장소성’이다.
그러한 이유로 유적을 떼어내 다른 곳에 전시하는 것으로는 이 역사적 가치를 온전히 대신할 수 없다.
주민센터는 옮길 수 있지만 역사는 옮길 수 없다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발전을 대립관계로 바라보는 시대는 지났다.
21세기 도시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건물을 지었느냐가 아니라, 그 도시만의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잘 보존하고 미래 자산으로 만들었느냐에 달려 있다.
공장도 다른 곳에 세울 수 있다. 아파트도 다른 곳에 지을 수 있다. 행정청사 역시 적정 부지를 찾아 이전할 수 있다.
그러나 500년의 역사가 중첩된 장소는 다시 만들 수도, 옮길 수도 없다. 따라서 이곳의 역사적 장소성을 보존하는 것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고현동주민센터와 복합커뮤니티시설은 인근 적정 부지를 확보해 별도로 건립해야 한다. 주민의 편의를 희생하자는 것이 아니다. 주민 편의와 문화유산 보존은 충분히 함께 실현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 앞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 터는 좋은 선례다. 서울시는 이곳을 개발 가능한 도심 부지로만 보지 않았다.
2013년 유적이 처음 확인된 이후 201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 2024년 1만 1,300㎡ 규모의 ‘의정부지 역사유적광장’으로 정식 개장해 시민에게 돌려주었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도 개발보다 역사의 장소성을 살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서울이 할 수 있다면 거제도 할 수 있다.
역사를 지킨다고 도시발전이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제대로 살릴 때 그 도시만의 품격과 경쟁력이 생긴다.
‘고현성, 포로수용소, 거제군청의 역사문화공원’과 역사문화관을 만들 때이다
이제 거제시는 결단해야 한다.
첫째, 현 부지를 역사문화공간으로 온전히 보존하고, 중요 유구의 현 위치 보존을 원칙으로 정밀한 보존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이 일대를 가칭 ‘고현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고 ‘고현성 역사문화관’을 건립해야 한다.
고현성 축성과 임진왜란 의병항전, 6·25전쟁과 포로수용소, 전후 거제 복군의 행정사를 하나의 시간축으로 연결한다면 전국적으로 차별화된 복합 역사문화공간으로 탄생될 것이다.
셋째, AR·VR·AI를 활용해 사라진 고현성의 성문과 해자, 성내 거리와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디지털로 복원하자는 제안이다.
시민과 관광객이 500년의 시간을 직접 걷고 체험하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과 역사관광의 체험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포로수용소유적공원과 연계해 이곳을 ‘제2의 포로수용소 역사문화 거점’으로 육성해야 한다.
옥포대첩, 칠천량해전, 기성관과 거제의 성곽·해양문화유산까지 연결한다면 거제 전체를 하나의 역사문화벨트로 발전시킬 수 있다.
2004년의 무지와 잘못을 다시는 반복해서 안 된다
2004년 고현성 발굴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당시 고현성 동문지와 해자가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생생하게 드러났다. 수백 년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던 역사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다시 덮어버렸다. 그때 고현성 동문지와 해자를 제대로 보존했다면 오늘 고현동 도심에서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문화공간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뼈아픈 잘못을 이번에는 절대로 반복해서는 안 된다.
2004년에 놓친 역사를 2026년에 또다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의 선택은 공사 일정이나 예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100년 뒤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질문이다.
주민센터는 다른 곳에 지을 수 있다. 그러나 500년의 역사는 두 번 다시 만들 수 없다. 이번에는 역사를 콘크리트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현 유적을 온전히 보존하고 역사문화공원과 역사문화관으로 되살려, 다음 세대가 자랑스럽게 기억할 거제의 귀중한 역사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도시는 건물을 많이 지었는가로 기억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지켰는가로 기억된다.
역사를 지우는 도시는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역사를 지키는 도시는 찬란한 미래를 얻는다.
역사는 도시의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도시의 미래다.